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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이야기

조선의 굴욕을 담은 영화 남한산성

by Yolo life 2023.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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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패배한 조선 삼전도의 굴욕을 맞이하다.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1636년 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대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임금과 조정들이 항복을 결정하게 되는 47일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이다.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한 감독 황동혁 감독이 연출하였으며 주연 배우로는 김윤석, 이병헌, 박해일, 고수가 출연하였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병자호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영화[남한산성]포스터

 

청나라의 침입. 병자호란 

16세기말에 발생되었던 '임진왜란'은 한국 주변 국가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중국의 강대국이었던 명나라는 '임진왜란' 참전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진족 수장인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함과 동시에 빠른 성장을 하게 된다. 한편 '임진왜란'을 치른 조선도 상황이 그리 좋진 않았다. 광해군은 국가의 생존을 위하여 명나라와 후금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고 큰 마찰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인조가 다음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인조는 광해군과는 다르게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쳐 후금을 자극하게 된다. 때마침 광해군을 지지하던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후금으로 도망치게 된다. 1627년 후금은 앞서 투항한 강흥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하여 3만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향해 진격하게 되어 '정묘호란'이 발발한다. 침공 소식을 접한 인조는 조정과 함께 급히 강화도로 피난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시킨다. 한편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까지 진군한 후금은 명나라의 관계 때문에 장기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금은 강화도로 사신을 보내 조선 조정과 교섭을 시도하게 된다. 조선 조정 내부에서도 항쟁을 할지, 친목을 맺을지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결국 후금과 '형제지맹'을 맺어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정묘호란'은 일단락 되게 된다. 이후 후금은 약속을 어기고 국경인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키며 식량을 강탈하고 병선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해왔고 압록강 일대의 민가를 약탈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어 변방의 백성들은 괴로움 속에 살게 된다. 약속을 어긴 후금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계속되자 군사를 일으켜 후금과 전쟁을 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다. 후금은 조선과의 맹약 이후로 세력을 더욱 넓혀가고 있었다. 만주와 내몽고 땅을 대부분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세력이 커진 후금은 더욱더 강압적인 태도로 돌변하였다. 후금은 '정묘호란' 때 맺은 동등한 나라의 동맹인 '형제지맹'을 왕의 나라와 신하의 나라인 '군신지의'로 고칠 것을 요구하였고 황금과 말, 병사들까지 무리하게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수년 후인 1636년 2월 인조비인 인열왕후의 조문을 위해 용골대, 마부대 등 사신들이 조선으로 오게 된다. 사신들은 '군신지의'를 다시 강요하였고 임금과 조정은 분노하여 사신과 직접적인 접촉을 거부하고 감시하게 된다. 조선의 대응에 상황이 심각하다 여긴 용골대 등은 본국으로 도망치게 된다. 인조는 후금과 전쟁을 준비하라는 편지를 평안감사에게 보냈는데 도망치던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겨 후금은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조선을 다시 침략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2개월 뒤인 1636년 4월 후금의 수장 태종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쳤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태종은 더욱더 분노하게 된다. 12월 2일 청나라는 12만 대군을 끌고 '군신지의'를 거부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진군하게 된다. 청나라 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고 12월 14일 개성을 통과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은 급하게 강화도로 파천을 결정하고 이동하려 했으나 이미 이동 경로가 청나라 군에게 점령당해 포기하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 대책을 강구하게 되고 급한 대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 일행은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다시 한번 강화도로 떠나려 했으나 많이 내린 눈 탓에 떠나지 못하고 산성에 돌아오게 된다. 산성에는 13,000명의 병사와 약 50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 밖에 없었다. 명나라에 도움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고 수비 태세에 돌입하였다. 그러는 사이 청나라 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서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게 된다. 작은 전투들이 반복되고 수십일이 지나자 성안은 처참해졌다. 명나라에 구원 요청을 했지만 명나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지방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한산성은 고립되어 희망이 없어지자 신하들은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뉘어 논쟁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 주범을 인도하고 인조가 직접 성 밖으로 나와서 항복하라고 제시한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를 포함한 약 500백 명과 동행하여 남한산성을 나와 한강 동쪽의 삼전도에서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행하고 항복 조약을 맺는다. 의식이 끝난 후 인조는 궁으로 환궁할 수 있게 되었고 삼전도에는 태종을 칭송하고 승리를 축전하는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청군은 항복조약대로 왕 친족들을 인질로 삼고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 주범들을 포로로 잡아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렇게 병자호란은 마무리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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