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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이야기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모두가 꿈꿔온 왕

by Yolo life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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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왕의 모습을 담은 가짜 왕 이야기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실존 인물인 광해군을 모델로 하여 승정원일기에서 삭제된 15일간의 빈 시간 사이 왕과 똑같이 닮은 가짜 왕이 조선을 다스렸다고 상상하고 만든 팩션물이다. 약 100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제작된 이 영화는 이병헌, 류승룡 주연으로 2012년 9월 13일에 개봉하여 약 1,200백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였다. 이 영화의 실존 인물인 광해군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영화[광해] 포스터

중립외교 정책의 광해군

조선의 15대 임금인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후궁 공빈 김 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비인 의인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아홉 명의 후궁에게는 열세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첫째가 임해군 둘째가 광해군으로 임해군이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포악한 성격 탓에 대중에게 외면받게 되어 둘째인 광해군이 세자에 오르고 왕위를 계승했다. 생모인 공빈 김 씨는 출산 후유증으로 광해군을 낳은 지 삼 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선조가 왕자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는 물었고, 다른 왕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답하였지만, 광해군만 소금이라고 대답을 했고, 선조가 그 이유를 물으니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고, 임금이 다음 질문으로 "너희들이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니 광해군은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 뒤 임금이 보물을 성대하게 진열해 놓고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였는데 다른 왕자들이 보물을 갖기 위해 다투는데 광해군만 붓과 먹을 가져가는 걸 보고 기특하게 여긴 임금은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에 관심이 많고 효심이 깊다고 판단하였다. 광해군이 열여덞 살이 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빠르게 북상하였다. 그리고 보름 만에 믿고 있던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백성들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고 왕실에 위기가 닥쳐오자 선조도 평양으로 피난을 준비하게 되었고 신하들의 건의 끝에 서둘러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고 광해군은 왕세자가 된 다음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이후 선조와 의주까지 피난하게 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선조는 국왕의 권력을 왕세자에게 나누어주어 민심을 수습하고 의명을 모집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도, 함경도 등 한양 이북지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분조 활동을 완수하고 복귀하였다. 반면 친형인 임해군은 선조의 명령을 받고 함경도로 민심을 수습하려던 도중 부하인 국경인의 반란 때 사로잡혀 일본군에 인질로 넘겨지게 되어 광해군과 비교되게 된다. 이후 명나라의 지원으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개성을 탈환하여 왜군이 물러나게 되었다. 1594년 사신을 파견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 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며 거절당하였다. 1606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조정은 광해군이 서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뉘게 된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해지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교지를 내렸으나 소북의 유영경이 이를 숨겼다가 대북의 정인홍에게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뒤 정국의 안정을 위해 당파를 불문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당파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었고 민생을 안정시킬 많은 방책들이 나오게 된다. 그때 나온 대표적인 것이 대동법이다. 대동법으로 인해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김제남을 사형하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배 보냈지만 다음 해에 살해당한다. 광해군은 균형 있는 외교정책에 추진했다.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여 강대해지자 국방력 강화를 위해 대포를 만들고 능력 있는 장수들을 임명하였다. 한편으로 명나라가 후금과 전쟁을 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강흥립, 김경서에게 1만 군사를 주어 파견하여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 전세를 보아 투항하도록 명령했다. 명나라가 패하자 강흥립은 후금에게 투항한 뒤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하여 후금과의 전쟁을 모면하였다. 명나라의 요청도 지키고 후금과의 사이도 지킨 실리적인 조치였다. 1623년 서인 일파의 무력 쿠데타에 의해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1641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묘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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